‘사랑은 변하는거야’라는 말처럼 사람은 늘 변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언뜻 들으면 쉬운 말일 수 있지만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많이 다를 수 있다. 사랑하던 연인이 시간이 지나 이유가 뭐였건간에 서로 마음이 멀어져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랑은 변하는거야’라는 말로 스로에게 위로하는 말이다. 결합 가능성이 전혀 없어 체념과 함께.. 또 다른 뉘앙스는 세상 일이 늘 변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후자의 경우 세상일을 일관성 없이 쉽게 변덕스럽게 변하는 경우는 사실 인관관계에 있어 최악이다. 대부분 사람의 판단기준은 옳고 그름에 따라 결정하기 보다는 그때 그때 사리사욕에 따라 결정한다. 이때 대부분은 개인의 장기적인 이익에 근거하기보다 단기적인 이익의 판단에 따른다. 멀리 보는 이익은 불확실하고 가까운 이익이 더 쉽게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길고 짧고의 차이일 뿐 대부분 사람들이 일을 결정할 때 결국 이익을 극대화시켜 최종적으로 판단한다.
모든 일의 판단의 근거는 일차적으로 이익이지만 자칫 일을 그르치기 쉽다. 그래서 후회하기도 한다. 돌이킬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작고 큰 일 들이 많다.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은 순간순간 이익을 따져보고 회사가 이득이 되도록 결정한다. 잘못해 회사를 실패하는 친구도 있다. 소소한 경우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길게는 다시 회복하지 못하기도 한다. 후자의 내 친구는 회사에 실패하여 정말 마음이 아프다. 학생들이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회사를 가든지 교수나 연구원이 되기 위해 포닥을 결정한다. 회사의 경우 어떤 회사를 선택해야할까, 돈을 많이 버는 회사, 돈은 많지 않더라도 안정적으로 길게 갈 수 있는지, 경험을 바탕으로 장기적으로 스스로 회사를 세울지 있는지등 고민한다. 또 포닥도 어디를 선택할지, 개인교수 연구력을 볼지, 좋은 대학이나 연구소를 선택해야 할지등 고민이 많다. 졸업생중 여러 예가 많다. 당장 이득에 앞서 결정하고 시간이 되면 결국 손해가 되어버린다. 어떤 졸업생은 길게 보고 판단해 당장은 손해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가 나온다. 결혼을 앞에 둔 젊은 친구들도 고민은 마찬가지다. 배우가 돈이 많고 좋은 직장을 가진 배우자를 원한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돈이 없어도 미래 촉망이 되는 배우자를 선택할지를 고민한다. 돈은 없더라도 잘생긴 사람을 선호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가진자는 드물어서 대부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모든 일의 판단기준이 정말 이익에만 근거할까?
그런 이익의 선택기준이 꼭 최선만은 아니다. 각자 갖고 있는 개인의 가치관도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마지막 스스로 반문해야할 질문은 바로 사람이 갖고 있는 가치관이다. 나같이 연구하는 사람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지식의 유희’에 대한 즐거움없이 인생이 시시하다. 매일 새로운 지식을 찾아낼때 그때마다 소소한 즐거움과 희열이 있다. 돈을 벌려는 사람은 돈을 더 벌어 회사를 확장하려고 하고 기부하는 즐거움이 있고 그 돈으로 사회에 더 가치있는 곳에 투자한다. 예들 들어 빌게에츠는 치매, 환경등에 투자하여 사회에 공헌하려고 한다. 더 거창하지 않아도 가난한 가족을 위해 돈을 버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말하자면 사람에게는 다양한 기치관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런 다양한 가치관을 모두 따지고 나서 일을 결정한다. 유발 하라리로 해석하면 알고리즘 결과이다. 나는 살면서 특히 나이 들다 보니 작고 큰 많은 결정을 해야한다. 때로 최선의 선택을 하기전에 밤새로 고민하기도 하고 때로 며칠씩 혹은 그 이상동안 고민하기도 한다. 주위 다른 사람들한테 자문을 구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질문하는 것은 이 일의 핵심 즉 ‘본질’이 무엇인가이다.
알고리즘을 만들어낼 때 가장 위험한 것은 가짜 정보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정보는 사실 대부분 불필요하가나 거의 사기에 가깝다. 가십이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가짜 정보를 퍼트기기도 한다. 선거때마다 대부분 99% 사기다. 오히려 정보를 듣지 않는 것이 본질을 간파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유발 하라리가 21세기 제언에서 가짜정보를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이유이다. 트럼프처럼 공공연하게 공갈치는 경우는 반대로 생각하면 휠씬 명료해진다. 대부분 사람들은 영리하여 사기를 구분하지 못하게 한다.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다. 사기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본질’의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개인의 가치를 깊숙이 쳐다보고 성찰해한다. 이기적인 주장인지 공의를 위함인지 세부를 쳐다봐야 한다. ‘detail is the demon’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세부를 쳐다보지 않으면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판단의 근거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지만 결과가 나빠도 스스로 자기의 판단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순한 사리사욕의 근거를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때’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화장실 앞에서는 다른 이유를 따질 이유가 없다. 오로지 한가지 동물적인 이유 즉 화장실에 들어가야 한다. 지금이야 그런 일이 없겠지만(?) 내가 서울 달동네 산등성이에서 살던 시절 고등학교때는 공동화장실이 있었고 모두 아침에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야했다. 그 다급함이란.. 그러나 나오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가 젊었을 때 기말쯤 성적을 구걸하는 학생들이 간혹 있다. 졸업하기 위해서 취업을 위해서, 학점을 따야하는데, 물론 당연히 성적을 위해서, 전에 이미 열심히 공부해야 했겠지만 여러 이유로 결과적으로 성적을 얻어내려고 한다. 그 절박함으로 무릎을 꿇기도 한다. 교육학적으로 다음 성적을 제출조건으로 성적을 인정해주기도 하지만 100% 다음 학기에 돌아오는 학생은 없다. 이런 기준 판단은 이기적이다. 그런 경우 오래 가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손바닥 뒤집히듯이 쉽게 그때 그때 판단을 뒤 짚는다. 그런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다. ‘사람이 아무니니다’는 내가 자주 쓰는 개그처럼 그런 사람이다. 염치가 없는 사람이다.
리더의 역할은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때’를 경계해야 하고 ‘염치’를 알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리더의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