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무(劍舞) - Black Wave 특별기증전 개최 (2019.5.31 ~ 2020.5.29)
-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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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30
1. 검여 「관서악부」 최초 상설 전시.
2. 총 34m, 3,024자에 이르는 검여 유희강의 대작 「관서악부」, 표암 강세황 「관서악부」 동시에 최초 공개
2. 우수 대표작 ‘완당정게(阮堂靜偈)’ ‘무량청정(無量淸淨)’ 등 공개
3. 우수 마지막 작, 좌수 마지막 작 최초 공개
4. [그림을 곁들인] 미공개 실험 작 30여 점 최초 공개
5. 유품, 서적 등 20여 점 자료 최초 공개
□ 성균관대박물관(관장 조환)은 현대 한국 서예를 대표하는 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 1911∼1976)의 유족들(유환규, 유소영, 유신규)로부터 수 백점의 작품을 기증받아 《검무(劍舞) - Black Wave》라는 주제로 특별전시회를 5월 31일부터 개최한다.
검여 「관서악부」 최초 상설전시. <검여 관서악부실> 마련.
검여 「관서악부」와 표암 강세황 「관서악부」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
200년 시차를 넘어선 우정의 서사시 「관서악부」
□ 「관서악부(關西樂府)」는 1775년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가 지은 서사시로,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짝을 이루는 한문 문학의 정수(精髓)로 꼽히는 작품이다.
신광수는 1746년(영조22년) 과거시험에서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라는 답안지를 제출해 합격했다. 이 글은 조선 후기 ‘관산융마(關山戎馬)’라고 불리며 전국적으로 애창한 노래가 되었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1720-1799)과 신광수는 어릴 때부터 교류를 이어온 절친한 친구였다. 채제공이 1774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할 때 여러 문인들이 축하 모임을 열었고 시를 선물하였는데, 이때 신광수는 영릉에 봉향(奉香)을 하러 가 참석을 하지 못했다. 채제공은 이를 아쉬워하여 신광수에게 평양과 관련된 서사시를 요청했다. 신광수는 여러 번 평양을 여행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채제공이 평안도관찰사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것을 기원하며 108수에 이르는 대작 「관서악부」 지었다.
신광수는 완성된 「관서악부」를 당시 최고의 명필로 불리던 친구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에게 보내 글로 옮겨 줄 것을 부탁했다. 강세황은 이것을 허락하고 「관서악부」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신광수가 사망하였고, 강세황은 친구 신광수의 뜻에 따라 글을 완성한 후 말미에 그 내역을 기록하여 아들에게 주었다. 이러한 「관서악부」 ‘원본’은 그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데, 이번에 최초로 공개되어 연말까지 전시된다.
서예가 검여에게 「관서악부」는 인생의 변곡점을 이룬 작품이다. 검여는 필생의 역작(力作)으로 「관서악부」를 택하였다. 그리고 「관서악부」 108수 전 작을 세 번이나 다시 쓰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이 마감된 후, 그 동안의 소회를 밝히기 위해 발문을 짓고, 마음의 벗[心友] 청명(靑冥) 임창순(任昌淳, 1914-1999)에게 교정을 부탁했다. 하지만 뇌출혈증이 다시 발병하여 운명하였다. 끝을 마감 짓지 못한 「관서악부」의 발문은 임창순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현대 한국 서예사의 대작이 탄생하게 되었다.
「관서악부」는 조선 시가문학의 대표작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와 함께 신광수와 강세황의 우정을 상징하는 표암서 「관서악부」, 200년 후 유희강과 임창순의 우정이 어우러진 검여서 「관서악부」에는 이처럼 또 다른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검무(劍舞) - Black Wave》전은 「관서악부」를 통해 검여 유희강 선생의 불굴의 예술혼을 볼 수 있다. 또한 당대 최고의 문학가이며 서예가였던 신광수와 강세황, 유희강과 임창순의 우정과 예술정신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 詩境(시경) - 추사와 옹방강, 검여와 최순우
충남 예산 추사고택을 찾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화암사 뒷산 바위에 새겨진 ‘詩境(시경)’이라는 글귀를 찾는다. 추사 김정희는 17세 때 관직에서 물러난 조선 최고의 석학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신다. 박제가는 중국의 최고 석학인 옹방강을 직접 만나 친분을 쌓았던 인물이다. 박제가가 운명하자 추사는 하염없이 그를 그리워했다. 추사의 아버지인 김노경은 추사에게 생원시에 합격할 경우, 북경에 함께 갈 것을 약속했다. 생원시에 합격한 추사는 아버지를 따라 수행원 자격으로 북경을 방문했다. 여기서 추사는 옹방강과 완원을 만난다. 옹방강은 추사에게 남송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육유(陸游, 1125-1210)의 예서체 글씨 ‘詩境(시경)’을 선물했다. 추사는 이를 가져와 고향집 뒷산 바위에 새겼다.
검여는 추사가 새긴 육유의 예서체 ‘詩境(시경)’을 전서(篆書)로 재해석하였고, 친분이 깊었던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인 최순우에게 선물했다. 검여 유족들이 기증한 작품 가운데에는 예서체, 전서체와는 다른 해서체의 습작이 발견되었다. 검여 선생이 쓴 해서체 ‘詩境(시경)’은 뚫어진 종이를 메운 재활용 종이에 간결하면서도 호방하게 정성을 들여 써내려간 인간 유희강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해서체의 글씨들은 경지에 오른 검여의 유연하면서도 날카롭고 자유분방한 글솜씨의 진수가 나타난 놀랍고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검여의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 - 만주(晩洲) 정창주(鄭昌胄)의 재발견
예나 지금이나 한자로 된 작품은 으레 이백과 두보, 백거이, 소식 등 중국의 명작이 주를 이룬다. 검여도 중국의 명작을 많이 썼지만, 한편으로 이제현, 이색, 정몽주, 김정희의 작품을 즐겨 인용하였다. 특히 만주(晩洲) 정창주에 주목했다. 오른손이 마비되어 왼손으로 글씨를 쓰게 된 이후에도 붓글씨는 거의 복구되었지만 펜으로 쓰는 글씨는 회복되지 않았다. 이러한 처지에서도 정창주의 시집에서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사력을 다해 볼펜으로 한권 가득히 필사했다. 그리고 볼펜으로 필사한 작품들은 능란한 필치의 붓글씨로 재탄생했다.
검여 선생은 정창주가 9세 때 지었다는 ‘영설(詠雪)’[-눈을 노래하다-]에 주목했다. 이 시(詩)는 정창주가 따뜻한 봄날 산봉우리 가득 피어난 꽃들이 눈송이 날리듯 떨어지는 모습을 눈 내리는 풍경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검여는 붉은 종이에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 손을 들어 좋아하는 아이를 그리고, 그 위에 정감 가득한 글씨로 감정을 표현했다.
검여는 1968년 뇌출혈증으로 인해 오른손 마비되었다. 하지만 이를 1년 만에 극복하였다. 그리고 동서양의 글씨와 그림을 조화시키기 위해, 형태, 모양, 재질 등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했다. 「영설」은 ‘좌수서(左手書)’시기 검여의 새로움을 향한 끝없는 지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 특징 있는 작품
1. 「연수(煙樹-안개 가득한 곳의 나무)」는 아득한 세계에 놓여진 나무를 칼날선 같은 글씨로 힘차게 표현했다. 검으로 춤을 추는 검무와 같이 긴장감 있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2. 「제석파란(題石坡蘭)」은 추사 김정희의 ‘題石坡蘭卷(제석파란권)’에 실린 글에 바위와 난 그림을 곁들인 검여 ‘좌수서’ 절정기의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걸작이다. ‘웅장한 기세의 바위와 숨은 듯 드러나는 난[石坡深於蘭]’이 춤추듯 흐르는 글씨의 중간과 아래에 배치되어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루었다. 추사의 ‘不二禪蘭(불이선란)’과는 다른 검여의 독특한 예술세계가 나타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