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o Examicus – 시험형 인간(2018. 9. 14 ~ 12. 28)
-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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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3
‘Homo Examicus – 시험형 인간’ 기획전 개최
9월 14일(금) 오전 11시 오프닝
시험에 중독된 한국인의 모습
우리는 언제부터 ‘시험형 인간’이었던가?
□ 성균관대학교 박물관(관장 조환)은 오는 14일(금)부터 ‘Homo Examicus – 시험형 인간’이라는 주제로 제37회 기획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대학졸업자의 절반 이상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이 땅에서 치러진 시험을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조망하며, 어제를 살았고 오늘을 살며 내일을 살아나갈 우리에게 시험이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기획되었다.
□ “인생이란 시험의 연속이다”라는 말처럼,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시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와 같은 존재이다. 입시를 위해, 취직을 위해, 그리고 자격증 취득 등을 위해 시험을 준비하는 우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Homo Examicus, 즉 시험형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변화를 반영하여 전시는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시험을 ‘시험의 기원’, ‘과거의 시작’, ‘그들의 시험’, ‘모두의 시험’이라는 주제들로 나누어 구성했다.
□ 우리나라에서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행해진 시험의 역사는 전통시대에는 일부 계층을 위한 과거시험이 존재했다면, 근대 이후에는 시험이 대중화되고 확대되는 ‘모두의 시험’으로 변모했다. 이 전시에는 단원 김홍도가 과거장 풍경을 묘사한 ‘공원춘효도’에 그려진 거대한 우산을 고증하여 실물로 제작했다. 조선시대 과거의 수석 합격자의 복식인 앵삼, 복두, 어사화의 복식과 함께 영조 때의 그려진 오수채 초상을 바탕으로 흑단령을 제작했고, 정조가 과거합격자에게 독한 술을 마시게 했던 ‘팔환은배’도 재현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응시하는 것조차 특권층에게만 허락되었던 시험이 신분 상승과 출세의 지름길을 넘어 우리 모두의 일상이 되어 온 과정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주요 전시물로 조선 후기의 이색 풍경 ‘소과시험장의 우산’, 정조의 독주를 견딘 ‘오태증의 백패’, ‘개천의 용’ 사법고시의 추억 홍남순의 법복, 팔환은배八環銀杯, 삼鶯衫, 복두幅頭, 어사화御史花, 등이 있다.
□ 18세 빈공과에 합격해 중국을 떠돌다 28세에 귀국한 최치원, 3번 낙방해 고민하다 이름까지 ‘합격’을 의미하는 ‘규성(奎星)’으로 이름을 바꾼 이규보(李奎報), 24세까지 3번을 낙방한 퇴계 이황 등등 너무나 오래전부터 ‘시험’은 우리에게 꿈과 희망이자, 넘기 힘든 고난이었다.
□ 시험의 고통과 합격의 기쁨, 현재 우리에게도 시험은 영원한 과제이다. 성균관대 박물관은 역사속에 사라져 버린 시험과 관련된 유물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새롭게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2018년 9월 14일부터 12월 28일까지 약 3개월 간 계속된다.
□ 전시물 추가설명
- 조선후기의 이색풍경 ‘소과시험장의 우산’
전통시대부터 시험은 출세를 위한 가장 좋은 사다리였다. 근대 이후 모두에게 시험의 기회가 주어지자, 그 기반이 되는 교육에 대한 관심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한국의 교육열을 낳게 되었다. 그 부작용의 하나는 현재까지도 입시부정, 출제오류, 내신조작 등 시험과 관련한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반향이다.
[소과시험장의 우산]
조선 후기 과거시험의 혼란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소과시험’이다. 정약용의 <경세유표>에 따르면 시험장에 수험생만 입장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팀’이 들어가 시험을 치렀다. 시험팀의 구성은 글을 지어주는 거벽(巨擘), 쓴 글을 정서해주는 사수(寫手)와 함께 작성된 답안지를 뛰어가 제출하는 수종(隨從), 이들이 시험장에서 함께 답안지를 작성하는데 필요한 돗자리, 우산 등을 옮겨 설치하는 노유(奴儒)와 시험장에서 좋은 자리를 잡고 제반 사항을 관리하는 선접(先接) 등이었다.
순조 초인 1809년 9월 16일 신현이라는 사람이 아들 신명호에게 소과시험 준비에 대해 당부한 서신이 있다. 이 편지는 시험장에 들어가서 관리하는 유능한 노유奴儒를 보내니 이들을 잘 대접하라는 당부의 내용이다. 또한 아들 신명호의 수험표인 조흘첩照訖帖과 함께 필요할 경우 대리시험을 치를 2명의 조흘첩도 보낸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명호는 낙방을 하고, 결국 음서로 관직을 받았다.
현재 김홍도가 그린 평생도 가운데 이러한 소과시험장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1점 미국의 개인이 소장한 1점이 전한다. 특히 미국인 Patterson 소장 그림은 강세황이 ‘시험장의 아침(공원춘효貢院春曉)’라는 제명을 단 것으로 거대한 우산 아래에 거자(擧子, 수험생), 거벽(巨擘, 글 짓는 사람), 사수(寫手, 글씨 쓰는 사람), 수종(隨從, 답안지 제출), 노유(奴儒, 돗자리, 우산 등 설치), 선접(先接, 제반 사항을 관리)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는 성균관대 박물관이 소장한 일산대(日傘臺)와 김홍도의 ‘공원춘효도’를 바탕으로 32개의 우산살로 구성된 직경 3m의 우산을 고증 제작하였다. 이와 함께 수험생이 쓰고 있는 복건(幅巾)과 거벽(巨擘)이 쓰고 있는 유건(儒巾)도 고증 제작하여 전시한다.
- 정조의 독주를 견딘 ‘오태증’
정조에게 독주는 순탄치 않은 집권과정을 같이 한 벗이었다. 한편으로는 노회한 관료들에 대항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실제로 정조는 내각의 관료들과의 술자리를 위해 ‘팔환은배(八環銀杯, 팔각으로 두른 은배)’를 만들어, 여기에 70-80도에 이르는 독주인 삼중소주(三重燒酒)를 가득 부어 마시게 하면서, 불취무귀(不醉無歸) 즉 ‘취하지 않으면 집에 가지 못한다’고 하여 취할 때까지 마시게 했다. 오태증은 1792년 식년시에 급제해 2월 28일에 합격증을 받았다.
[<정조실록>에 기록된 오태증의 백패]
이로부터 4일 후에 정조는 희정당으로 합격생들을 모아 시를 짓게 했다. 시를 지은 후, ‘내각용 팔환은배’ 큰 잔을 가져오게 해 5잔을 마시게 했다. 오태증을 제외한 다른 합격생들은 5잔을 다 마시지 못하고 쓰러져 별감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갔다. 정조는 오태증에게 다시 5잔을 마시게 했고, 이를 다 마신 오태증이 쓰러지자 집으로 보냈다. <오태증이 마신 술의 양은 삼중소주로는 2리터, 양주로는 약 6병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균관대 박물관은 <정조실록>에 기록된 오태증의 백패를 소장하고 있어, 이번 전시를 위해 팔환은배를 제작하고자 하였다. 우선 조선시대 잔의 형태, 크기와 용량을 검토하여 ‘팔환은배’를 고증하였다. 조선시대 큰 잔의 용량은 대채로 1홉이 좀 넘는 200-220CC 정도(소줏잔 4잔)이고, 팔각의 형태를 띤 모양의 순은제로 전통방식으로 정조가 제작한 내각용 팔환은배를 제작하였다. 또한 다산 정약용이 정조에게 불려가 마셨던 ‘옥필통’은 현존하는 몇몇 사례는 250CC(소줏잔 5잔) 내외이다. 정조는 과거합격 축하의 표시로 독주를 마시게 한 사실이 이채롭다.
-‘개천의 용’ 사법고시의 추억 홍남순의 법복,
강병순은 일제강점기 ‘개천에서 용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상점점원, 정미소 사무원으로 일했다. 정미소에서 일하면서 독학으로 1930년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고, 193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독지가의 도움으로 일본 주오대학에 입학했으며, 1938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와 행정과에 동시에 합격했다.
홍남순은 1930 일본 와카야마(和歌山)시립상공학교 졸업했고, 1948년 제2회 조선변호사시험 합격하여 광주지방법원 판사와 광주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변호사가 된 인물이다. 그는 변호사를 개업한 인권변론에 투신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시민학살에 항의하는 뜻으로 행진을 펼치다 내란죄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기도 했다.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과 시민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이번 전시에는 그가 판사의 재직시절 착용했던 판사복과 변호사 시기에 입었던 변호사복이 최초로 공개된다.
[홍남순 판사 법복]
이번 전시에는 최초의 여성변호사인 이태영이 1950년부터 1951년까지 고등고시 준비를 위해 10번 이상 통독한 민법책이 최초로 공개된다. 그는 책의 겉봉에 “집안자손들과 후배들에게. 永久히 보존하며 고시에 합격하기까지 할머니가 얼마나 고생스럽게 공부했나 참고하기 바란다.”는 글을 남겼다. 이 책은 당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고등고시에 합격한 이태영 박사의 노력과 정열이 담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