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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컬렉션

탁본

탁본(拓本)이란 나무, 돌, 금속 등에 새겨진 글씨나 그림(금석문(金石文))을 또렷이 보기 위해 종이에 대고 박아낸 것으로서, 사물에 직접 종이를 대고서 물을 뿌리고 밀착시킨 뒤 먹을 바른 탁봉(拓棒)으로 두들기거나 석화묵(石花墨)으로 사물 위에 붙인 종이를 문질러 만든다. 이는 예로부터 진짜 글씨를 감상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법첩(法帖)의 용도로 많이 쓰였으며, 훼손되어 읽기 어려운 비석의 원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어서 중요한 역사자료로 쓰인다.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三尊碑像), 통일신라 673년.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三尊碑像), 통일신라 673년.

 

우리 박물관에는 현재 1,000여 점의 탁본이 소장되어 있다. 이는 1960년대부터 약 30여 년 동안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금석문들을 조사 ‧ 연구하는 과정에서 떠온 것들이며, 특히 2010년 본교 부총장과 박물관장을 역임한 조동원(趙東元) 명예교수께서 40여 년 동안 수집하신 탁본 400여 점을 기증해 주셔서 소장 탁본의 질이 한층 향상되었다. 1990년대 이후 주요 문화재의 탁본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현재 존재하는 고대 ‧ 중세 금석문을 망라했다고 할 수 있는 우리 박물관 소장 탁본 컬렉션의 가치는 매우 크다.

 

우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탁본 가운데 중요한 것을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울주(蔚州) 천전리(川前里) 서석(書石) - 선사인과 고대인의 합작 예술품

울산광역시를 가로지르는 태화강의 한 줄기인 내곡천 중류 기슭에 있으며, 각종 도형과 글, 그림이 2단으로 새겨진 암석이다.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는데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 기마행렬도(騎馬行列圖), 동물, 용, 배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씨는 800자가 넘는데 법흥왕(法興王)과 왕비, 진흥왕(眞興王) 등이 이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며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이곳을 다녀간 화랑(花郞)들의 이름들도 여럿 새겨져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 사상 등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울주(蔚州) 천전리(川前里) 서석(書石)

1972년 천전리 서석 탁본 광경

 

서산(瑞山)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 - 지금도 또렷한 “백제의 미소”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 층암절벽에 조각된 거대한 여래입상과 보살입상, 반가사유상으로,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여 형성되었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 보살입상은 얼굴에 살이 올라 있는데,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천의를 걸치지 않은 상체에는 목걸이만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다. 고부조(高浮彫)라서 탁본하기 매우 어려운 불상이다.

 

서산(瑞山)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

 

문경(聞慶) 봉암사(鳳巖寺)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 신라 불교 ‧ 사회사의 집약

이 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을 개창한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 824~882)의 탑비로서, 신라 말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 857~?)이 비문을 지었다. 그가 비문을 지은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낭혜화상탑비(朗慧和尙塔碑), 진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와 함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비석의 크기나 귀부(龜趺)와 이수(螭首)의 조각수법도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할 정도로 뛰어나다.

 

이 비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지증대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 하대의 불교사 특히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1차 사료이며,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탑비를 세운 연대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비문을 쓰고 각자(刻字)한 사람이 분황사(芬皇寺)의 승려 혜강(慧江)임이 밝혀져 있어서 한국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문경(聞慶) 봉암사(鳳巖寺)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복녕궁주(福寧宮主) 왕씨(王氏) 묘지명(墓誌銘) - 고려 사람의 삶과 죽음, 여기 담기다

고려시대의 묘지명(墓誌銘)은 주로 점판암을 가공한 판석(板石)이나 석관(石棺) 안에 돌아가신 이의 이름과 사망일자, 가족사항, 업적, 매장한 장소 같은 내용과 고인을 추모하는 명(銘)을 새겨 시신과 함께 안치하는 물건이다. 이는 『고려사(高麗史)』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같은 사서(史書)에 등장하지 않는 고려 사람들의 생활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문학사 ‧ 서예사에서도 귀중하게 여겨진다.

 

이 묘지명은 고려 숙종(肅宗)의 4녀로 태어나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복녕궁주 왕씨(1095~1133)의 것이다. 왕실 인물의 묘지명답게 글씨나 조각 솜씨가 일품이며, 특히 명문(銘文) 첫머리에 ‘천자지녀(天子之女)’라는 표현이 있어 당시 고려의 국왕을 ‘천자(天子)’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복녕궁주(福寧宮主) 왕씨(王氏) 묘지명(墓誌銘)

 

용인(龍仁) 조광조신도비(趙光祖神道碑) - 대학자의 삶을 대학자가 적어내리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개혁가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신도비(神道碑)이다. 신도비란 정2품 이상 고관(高官) 또는 시호(諡號)를 받은 학자 ‧ 문인 등의 묘도(墓道) 앞에 세워 그 사람의 공적을 밝히는 비석으로, 대개 당대의 명사와 명필들이 글을 짓고 쓴다. 이 비는 조광조가 죽은 지 60여 년이 지난 1579년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영의정까지 오른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 글을 짓고 뒷날 북인(北人)의 영수가 되는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글씨를 썼다. 조선 중기 정치사와 유학사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용인(龍仁) 조광조신도비(趙光祖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