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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묵

위창 오세창 사진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

 

『근묵(槿墨)』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선인들의 묵적(墨蹟) 중에서 서간류(書簡類)의 소품(小品)을 수집하여 엮은 것이다. 총 34책으로 된 첩장본(帖裝本)이다. 오세창은 같은 형태의 것을 2부 만들었는데, 1부는 『근역서휘(槿域書彙)』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 책은 일찍이 박영철(朴榮喆)의 손에 들어갔다가 그에 의해 당시의 경성제국대학에 기증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또 다른 1부가 곧 이 『근묵』이다. 이 책은 오세창의 유족이 1964년에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오세창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말년 제자이기도 했던 오경석(吳慶錫)의 아들이다. 1864년 7월 15일에 서울 중부 시동(時洞: 지금의 청계천 2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다. 그는 1898년(35세) 개화당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906년(43세) 손병희(孫秉熙) 등과 귀국하여 『만세보(萬歲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하였고, 이후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1910년(47세) 한일합방 이후 그는 서예(書藝)와 전각(篆刻)에 전념하며, 고서화(古書畵)와 인보(印譜)에 대한 편찬 작업을 시작하였다. 1919년(56세)에는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2년 8개월을 복역하였다. 1921년(58세)에 출옥한 이후에는 사회활동을 피하고 서예와 전각 작품의 제작 및 고서화 자료의 편저 작업에 몰두하였다. 1953년 4월 16일 대구 대봉동에서 9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그는 서화를 풍부하게 수장(收藏)하였고 또한 감식안이 높은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편저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은 불모지였던 우리 미술사학에 기초적인 공적을 남긴 대저(大著)로 평가받는다.

 

『근묵』은 고려의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조선 초기의 정도전(鄭道傳), 성삼문(成三問) 등을 위시하여 이황(李滉), 이이(李珥), 정약용(丁若鏞) 등은 물론 대한제국 말기의 민형식(閔衡植), 이도영(李道榮)에 이르기까지 모두 1,136명에 달하는 인물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연대로 보면 정몽주의 출생이 1341년이고, 최후에 사망한 민형식이 1947년이었으니 상하 600여년에 걸친다. 그들을 신분별로 보면 위로 국왕에서 아래로는 중인, 천인계급에까지 이르며 직업별로는 관료, 학자, 문학가, 예술가, 승려 등이 총망라되었다.

 

서체별로 보면 행서(行書)가 595점, 초서(草書)가 468점으로 행초서가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 해서(楷書) 57점, 전예(篆隸)가 16점이어서 전(篆)·예(隸)·해(楷)·행(行)·초(草)의 구색을 모두 갖추었다. 그 문장의 내용은 서간(書簡)이 720점, 시고 (詩稿)가 353점, 제발(題跋) 및 기타의 종류가 62점으로 내용면에서도 다양성을 보여준다.

 

성삼문(成三問, 1418~1456) 간찰

성삼문(成三問, 1418~1456) 간찰)

 

『근묵』에 수록된 작품들 중 주를 이루고 있는 서간들은 600년 간에 걸친 우리 선인들의 생활사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는 정치, 학술, 문학에 관한 것도 없지 않으나 대부분은 친구끼리의 증답(贈答), 가족 간의 문안(問安)이 거의 전부다. 길흉(吉凶)을 서로 묻고 소식을 알리는 등 지필(紙筆)을 통하여 격의 없는 심정을 토로한 내용이 담겨있다. 문집에도 ‘서(書)’라는 항목이 있어 편지를 수록하였으나 그 내용이 학술, 문학, 역사적인 의의가 없는 것은 대체로 다루지 않았다. 그러므로 옛 사람의 사생활의 실태는 『근묵』과 같은 간첩(簡帖)이 아니고서는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근묵』은 이처럼 사회사의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근묵』에 담긴 글씨들은 자연스럽게 붓가는 대로 적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필치(筆致)는 유려하고 창달(暢達)하여 보는 이의 마음과 눈을 기쁘게 한다. 당대(唐代)의 명가(名家)인 안진경(顔眞卿)의 글씨에서 「쟁좌위고(爭座位稿)」와 「제질문고(祭姪文稿)」 같은 것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잘 쓰려고 힘들인 글씨는 점과 획과 짜임새가 모두 빈틈없이 완벽한 외형미를 갖추고 있으나 의식적인 속박과 형식상의 제약 밑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지 모르게 긴장미와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이런 점에서 아무런 제약도 없이 의도적인 작태를 무시한 서간의 서품(書品)은 그것이 글씨의 본바탕이며 작자의 개성을 그대로 살린 작품이다. 이런 면에서 『근묵』은 600년의 살아있는 서예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공사(公私) 간에 수장되어 있는 간첩류(簡帖類)는 그 수가 수천에 달할 것이나 그 내용이 풍부하고 역대인물이 거의 빠짐없이 망라된 것으로는 『근묵』과 『근역서휘』에 비견할 것이 현재까지는 없다.

 

이 밖에 『근묵』은 조선시대 서간형식의 변천과 서압[署押: 일반적으로 수결(手決)이라고 함]의 양상을 연구하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성균관대학교박물관은 1981년에 『근묵』 영인본과 임창순(任昌淳) 선생의 탈초를 붙여 발간한 적이 있고, 이후 1995년에도 재차 영인한 바 있다.

 

2009년에는 단순한 영인이 아니라 『근묵』의 원형을 충실하게 복원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원첩을 그대로 촬영하여 최대한 필묵(筆墨)의 질감을 살려낼 수 있도록 노력하였으며, 난해한 초서(草書)로 되어 있는 원문을 알기 쉽게 석문(釋文)을 수록하고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문도 함께 실었다.

 

2009년 영인·복원된 『근묵』

2009년 영인·복원된 『근묵』은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균관대학교출판부를 통해 구입할 수 있다.

 

문의: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02)760-12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