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부리 겨눈 과거 딛고… 추모의 길·다리에 ‘평화’ 키워드 (세계신문 15.07.13)
- 스마트그린시티랩
- 조회수361
- 2020-12-29
다낭시 현충원 공사현장 가보니
‘To(또·祖), Quoc(꾸옥·國), Ghi(기·記), Cong(꽁·功).’ ‘조국은 (전사자의) 공을 기억한다’는 뜻의 문구가 또렷이 새겨진 10층 건물 높이의 현충탑이 조용히 방문자를 내려다본다. 베트남 다낭시 깜레(Camle)구 호아방(Hoa vang)에위치한 이곳은 우리나라 전문가들의 자문으로 베트남 중부권 최대 평화공원으로 거듭나는 전승기념지(현충원)이다.
지난달 20일 베트남 다낭시에 위치한 깜레 전승기념지 재건 현장을 찾은 국내 전문가들과 깜레구 관계자 등이 분향을 하기 위해 현충탑 앞 분향대에 오르고 있다. 현충탑에는 ‘조국은 전사자의 공로를 기억한다’는 뜻의 ‘또(To) 꾸옥(Quoc) 기(Ghi) 꽁(Cong)’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비극적 역사 흔적 곳곳에
지난달 20일 다낭 국제공항에서 9㎞, 시내 중심에서 7㎞쯤 떨어진 깜레전승기념지 재건현장. 우거진 숲 사이로 ‘열사상념대’라 쓰인 현충원 입구에 들어서자 우뚝 솟은 현충탑 주변에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포클레인이 땅을 파고 보도블록이 뒤집힌 탓에 울퉁불퉁한 바닥에 깨진 돌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공사 중에도 추모객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현충탑 앞 모래 더미에는 수십개의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현충탑으로 뻗은 길 양쪽에 세워진 위패벽에는 전사자 7200여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현충원 한 편에는 독립전쟁 때 쓰인 방공호가 당시 형태를 유지한 채 보존돼 있었다.
베트남 민족은 우리처럼 고난의 근·현대사를 겪어야 했다. 프랑스 점령(1858년), 일본 점령(1941년), 프랑스 재점령(1946년), 베트남 전쟁(1960년) 등 전화(戰禍)가 국토 전체를 할퀴고 지나갔다. 공사 현장은 이곳이 과거 격전의 현장이자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강대국들을 물리치며 지켜낸 ‘자존심의 나라’임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베트남 다낭에 위치한 깜레전승기념지 재건사업에 참여 중인 성균관대 김도년 교수(오른쪽)와 서울연구원 김인희 박사가 지난달 20일 베트남 당국자들과 공사 중인 현충원을 찾아 분향하고 있다. 공사로 인해 분향로의 모래를 비우자 방문자들은 분향로 대신 현충탑 앞 바닥에 쌓인 모래 더미에 대신 분향했다.
◆현지 당서기, 한국팀 자문에 감동
베트남 당국이 1977년 세운 깜레전승기념지는 2003년 한 차례 리모델링 공사를 했지만 이후 다시 방치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지난해 말 재건이 결정돼 1만887㎡의 현충원과 1만5767㎡의 추모공원, 1만4133㎡의 시민공원을 갖춘 베트남 중부의 역사적 상징지이자 랜드마크로 재탄생을 앞두고 있다.
베트남에서 역사적 의미가 깊은 사업에 우리나라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팀이 참여하게 된 계기는 4년 전 인연에서 비롯됐다. 당시 민호끼(44) 베트남 공산당 당서기 겸 깜레구 인민위원장이 4년 전 다낭사회경제연구원장으로 재직 중에 김도년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에게서 다낭 개발에 대한 자문을 받았다.
이후 협력관계가 꾸준히 이어지던 중 민 서기가 깜레구 위원장을 맡자 마자 현충원 재건을 결정했다. 이때 주저없이 김 교수를 비롯한 한국인 네트워크에 자문을 했다. 베트남 현지법인을 갖고 있는 정림건축과 서울연구원 김인희 도시설계학 박사 등으로 구성된 자문팀은 지난 2월 현충원 조성과 관련한 마스터플랜을 제시하며 화답했다.
한국팀의 마스터플랜은 인민위원회 관계자들을 감동시켰고 이때부터 한국 자문팀의 주도 아래 공사가 추진됐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신뢰가 꾸준히 쌓이면서 민간외교가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베트남은 정책 사업에 외국인 참여를 배제하고 있지만 이번 프로젝트만큼은 걸림돌이 없었다.
민 서기는 현충원 설계를 한국인에게 맡긴 이유에 대해 “한국 자문팀은 다낭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최고의 전문가들”이라며 “그들의 능력을 신뢰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의 계획을 가장 잘 이해하는 도시설계가와 건축가의 도움을 받아 좀 더 멋진 가치를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민 서기는 다낭 내 서열 3위의 전도 유망한 젊은 정치인이다.
◆미래지향적 한·베트남 관계의 모델
이번 사업은 베트남이 가진 역사적 상징지를 재건할 뿐 아니라 중부권 랜드마크 조성을 통해 경제도약을 이룬다는 베트남 당국의 구상도 담겨 있다.
정림건축 베트남법인 박지훈 상무는 “역사적 기념지를 보존, 개발하는 동시에 관광인구를 끌어들여 베트남 중부권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목적 아래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전문가들이 제시한 마스터플랜도 현충원을 단순히 과거를 추모하는 공간을 뛰어넘어 미래의 희망을 그리는 공간으로 구현하는 게 핵심이다. 지식인과 농민, 노동자, 상인, 군인 등 베트남을 구성하는 5대 계급을 별의 다섯개 꼭짓점으로 구현해 추모의 의미를 더한다.
개발이 한창인 다낭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광장과 추모의 길, 다리 등을 조성해 ‘평화’를 키워드로 미래세대를 위해 나아가자는 메시지도 표현하고 있다.
베트남 현 정부와 한국은 과거 서로 총부리를 겨눈 적대의 역사를 갖고 있다. 국군도 베트남전에서 5000명 가까이 전사한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팀의 참여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한·베트남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도 밑거름이 될 전망이다.
자문팀의 김 교수는 “자문을 요청해온 베트남 관계자들은 과거를 한 번도 묻지 않고 신뢰를 보내줬다”면서 “전쟁으로 각자의 나라에 현충원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베트남의 현충원을 자문하고 있다는 데 책임감과 자부심을 크게 느낀다”고 말했다.
다낭=글·사진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링크
: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5/07/12/20150712002272.html?OutUrl=naver